50대 남성 A씨는 5년 전 부친의 암 치료비로 목돈이 필요해지자 제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기 시작했다. 고금리 2금융권 대출을 받은 대가는 가혹했다. A씨는 “수술비 마련에 생활비까지 부족해지면서 고금리라도 돈을 빌려주는 곳은 가리지 않고 찾았다”며 “빚 돌려막기가 한계에 이르면서 개인회생 절차를 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고금리와 경기 침체 여파로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한계에 내몰린 대출자가 급증하고 있다. 올해 들어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한 건수가 벌써 10만건에 육박하며 사상 최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23일 법원통계월보에 따르면 올해 1~9월 전국 법원에 접수된 개인회생사건 접수 건수는 9만7443건으로 집계돼 2004년 제도가 시행된 이래 3분기 기준 역대 최대치다.
특히 올해는 3분기까지 신청 건수만 집계됐지만 2021년(8만1030건)과 2022년(8만9966건)의 연간 신청 건수를 넘어선 상태다. 지난해 12만1017건으로 역대 최다 신청건수를 기록했는데, 현 추세대로면 지난해에 이어 최다 기록을 다시 한번 경신할 가능성이 크다.
빚을 감당하지 못하는 가계와 기업이 빠르게 늘면서 향후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은행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분기 말 기준 국내 가계대출자 1972만명 가운데 평균 연소득의 70% 이상을 빚을 갚는데 쓰는 대출자가 275만명(13.9%)에 달했고 이중 157만명(7.9%)은 평균 연소득의 100% 이상을 원리금 상환에 사용하고 있다. 한계에 내몰린 서민들이 증가하면서 신용회복위원회 채무조정 신청 건수도 2022년 13만8000여건에서 지난해 18만6000여건으로 늘었다.
김대환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는 “문재인 정부 때 집값이 폭등하자 ‘영끌족’들이 무리하게 대출 받았는데 대출 갱신주기가 돌아오며 이자 부담 등을 견디지 못하거나 파산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어 “코로나 시기 자영업자에 대한 대출 만기연장·상환유예 해주면서 빚의 덩어리가 커진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한국은행에 따르면 자영업자 다중채무자 연체율은 2021년 2분기 0.56%에서 올해 2분기 1.85%로 3년 새 3.3배나 급증했다.
청년층의 개인회생 비율이 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서울회생법원의 ‘2023년 개인회생 사건 통계조사 결과보고서’에 지난해 20·30대 개인회생 신청 건수는 9171건으로, 2022년(6913건)보다 32.7% 증가했다.
일정 기간만 빚을 갚으면 나머지 채무를 탕감해준다는 점을 악용해 개인회생 신청 전 고의로 대출, 명품 구입, 도박으로 거액의 빚을 지는 악성 채무자도 늘고 있다. 실제로 개인회생 관련 커뮤니티에는 “끊었던 도박병으로 1억 빚이 또 생겼다. 월급 300만원에 월세 60만원이라 돌려막을 힘이 없어 개인회생 알아보고 있다”는 취지의 글이 수시로 올라오고 있다.
이에 국회에서는 최근 장동혁 국민의힘 의원이 과다한 낭비·도박 그 밖의 사행행위로 재산을 감소시키거나 과대한 채무를 부담한 사실이 있는 경우 회생을 금지하기 위한 ‘채무자회생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개인 뿐만 아니라 기업도 고금리의 여파로 대출 이자비용에 부담을 느끼는 곳이 크게 늘었다. 23일 한국은행이 공개한 ‘2023년 연간 기업경영분석’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비금융 영리법인기업 93만5597개사의 이자보상비율은 191.1%로 집계됐다. 2009년 이후 최저치로, 2022년(348.6%)보다 157.5%P 급감했다.
이자보상비율은 영업이익을 이자비용으로 나눈 것으로, 100% 미만일 경우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강영관 한은 기업통계팀장은 “이자보상비율이 최저치를 기록한 것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주요 대기업이나 주요 업종에서의 수익성 지표가 워낙 안 좋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